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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나

300

by 노란갈매기 2007. 12. 21.

뒤북이지만, 영화 300에 관한 말들이 많길래
쥔장이 정리해볼까 한다.

세계사 시간에만 잘들어도 충분히 영화가 과장되고

왜곡된 거란걸 알수 있을텐데 말이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얼마나 대입시험을 위한
국영수 위주의 교육만 했는지를 다시한번 제대로 느끼게 됬다.


먼저 그리스와 페르시아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보자.


그리스는 각 도시로 된 일종의 자치동맹 체제였다.
각 도시마다 하나의 소 국가였고, 각각의 도시들이
그리스를 이루었다. 스파르타도 도시국가중 하나였다.

그리스는 호플라이트 라고 불리는 중장보병이 군의 핵심이었는데

이는 갑옷과 투구, 청동제 정강이받이와 방패, 창고 칼을 장비한 보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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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그리스 보병


이들 보병은 농민과 귀족들로 구성되었는데 농민답게
개인의 전투력은 형편없었지만, 밀집대형(방진대형) 형태에서는

그야말로 최고의 전투력을 자랑했다.
영화에서 그 방진대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방진대형은 그리스의 핵심전술이었고, 방진이 무너지면 전투는 바로 패배하는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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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방진대형


스파르타는 그 도시국가중 완전한 병영국가로서
영화에서 나온것처럼 남자아이의 경우
전사로 키우기위해 혹독한 군사훈련을 시켰다.
90년대 스파르타식 입시교육이란말이 바로 여기서 나온것이다.


페르시아는 기원전 5세기 키로스 왕이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다리우스1세 당시 지중해부터 인더스강 까지 최대의 영토를 보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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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PC게임 페르시아 왕자


페르시아는 정복지역에 관용정책을 통해 정복자들을 회유했다.
그리곤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 반란의 소지를 잠재웠다.
페르시아는 본국의 핵심병력 10,000명은 상비군으로 그대로 유지한체 정복지의
인종으로 유사시 30만의 군병력을 충원했다.
이런 방식으로 핵심전력이자 정예전력인 상비군은
언제든 최고 수준으로 유지할수 있었다.

다민종의 구성답게 군의 체계는 다양했고, 보병은 그리스와 달리
검과 방패 또는 활과 단검의 경장비 보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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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군의 검


그러나 핵심전력은 기병으로 키로스왕이 전투에서 얻는 경험을 살려
전술을 개발 페르시아의 핵심전력으로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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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기병의 전형적인 모습

페르시아 활은 대략 150m내외 거리였고 활 솜씨는 대단했던것으로 전해진다.
활의 경우 한곳에 집중적인 사격을 하는 전술을 이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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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우스 궁전 벽화중 궁사 모습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투 그리고 영화 300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은 페르시아 정복지였던 이오니아에서 비롯된다.
페르시아의 지배에 반발한 이오니아인은 반란을 일으켰고 그리스 본국은 이 반란을 지원한다.
페르시아는 이 반란을 진압하기까지 오랜시간을 투자해야했고
다리우스 1세는 영구히 반란의 근원을 뽑기위해
결국 그리스 원정에 나선다. 이것이 1차 그리스 페르시아 전이다. BC 492년
1차원정은 태풍으로 페르시아 함선 300척이 수장되면서 싱겁게 끝이났다.


BC 490년 2차원에 나선 페르시아는 600척의 군함과 2만 6천의 병사로 에게해를 건너
침공한다. 에레토리아를 점령하고 아테네 북부 마라톤 해안에 상륙한
페르시아군에 대항하기 위해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원군을 요청하지만
종교행사후에 파견가능하다는 답변을 받는다.
아테네의 명장 밀티아데스는 1만명의 시민병으로 마라톤 평원에서
모든 전쟁사 전술의 기초가 된 양익포위 전술을 이용 페르시아군을 격파한다.
이 전투가 바로 유명한 마라톤 전투이다.
승리를 알리기위해 전령이 뛰어간 거리가 42.195km였고

오늘날 마라톤 경기가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BC 480 영화 300의 바탕이 되는 3차원정이 시작된다.
다리우스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부왕의 유언을 받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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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세르크세스


16만의 병력과 1200척의 함선으로 원정을 단행한다.
헬레스폰토스(오늘날의 다르다넬스)해협에 선박을 이어만든
다리를 건너 에게 해 북쪽 해안을 거슬러 올라오자 그리스인들은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싸우기로하고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 7000명의

보병을 이끌고 신길을 지키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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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니다스


테르모필레에서 4일동안
정찰활동만 핀 페르시아군은 5일째부터 치열한 격전을 치루었으며
페르시아군을 물리치던 스파르타군은 7일째 되는날 그리스인 배신자들 통해
우회로로 들어온 페르시아군과 격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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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모필레 협곡


이 무렵 레오니다스는 병력을 분산 배치한 상태려서 1000명의 병력으로
페르시아 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한다. 분산배치된 다른 스파르타군 역시
포로가 되거나 전사한다.


전후 그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시인 시모니데스의 시를 세긴 비석이 세워졌다.

" 나그네여, 가서 라케다이몬(스파르타) 사람들에게 전해주오.

우리들은 명命을 받을어 여기에 잠들었다고..."


이 싯구절은 아주 머언 미래 2차대전중인 1943년 스탈린그라드에서

전멸한 독일 6군을 기리기 위한 방송에서

독일공군원수 헤르만 괴링에 의해 개작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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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모필레 전 지도



3차원정의 끝 그리고 종전


테르모필레전으로 시간을 번 그리스군은 해전으로 페르시아군과 싸우기로하고
결전지를 살라미스 섬과 아티카 사이의 해협으로 한다.
그곳은 폭 2~3km 으로 매우좁은 곳으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아들을 낳은곳으로
그곳을 장악한자가 바다를 장악한다는 전설이 전해져오는 곳이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육지 대부분을 점령한 상태라 해전의 필요성을 못 느꼈으나
그리스의 테미스토클레스가 위장간첩을 통해
"그리스군은 공포에 질려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다" 라는 거짓정보를 흘려
크세르크세스를 유인한다.
결국 함정에 걸려든 크세르크세스는 함선 400척을 잃고 본국으로 회군한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 페르시아간의 3차 전쟁은 끝이나고 아테네는 지중해의
실질적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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